윤정환 “2002년 벤치신세 분하지만 히딩크 가장 존경”










12년 뒤 윤감독의 사간도스는 인구 7만명의 소도시 도스의 축구열풍을 이끌고 있다. 지난 5월17일 도스의 베스트 어메니티 경기장엔 하늘색 사간도스 유니폼을 입은 시민들로 가득 찼다. 윤형중 기자, <한겨레> 자료사진, 사간도스 구단 제공

[토요판] 커버스토리 / 윤정환 감독 인터뷰

“무명팀 1등 이끌며 인생 공부…그래도 히딩크 가장 존경”

▶ 스포츠는 다양한 드라마를 만들어냅니다. 월드컵과 올림픽 등 큰 무대에서 활약하며 화려한 스타로 비상하기도 하고, 조연에 머물거나 실패의 쓴맛을 보는 경우도 있죠. 4강 신화를 썼던 2002년 월드컵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한국 대표팀에서 단 1분 1초도 뛰지 못한 선수는 5명 있었습니다. 그중 한명인 윤정환 사간도스 감독은 J리그에서 성공신화를 쓰고 있습니다. 이번 월드컵에선 어떤 드라마가 펼쳐질까요.


“솔직한 마음으로 그땐 너무 분했습니다.”

2002년 월드컵, 온 국민이 승리의 환희에 빠져 있던 당시 후보선수로 벤치에 앉아 있던 윤정환(41) 사간도스 감독의 마음은 울분으로 가득했다. 거스 히딩크 감독은 그를 단 1분도 월드컵 경기장에 서게 하지 않았다. 히딩크는 체력이 부족하고 수비 가담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윤정환과 안정환 두 테크니션(기술이 뛰어난 선수) 선발을 배제해왔다. 그런데 월드컵이 다가오는데도 게임을 풀어갈 플레이메이커가 없다는 여론이 커지자 두 선수를 최종 명단에 포함시켰다. 결과는 천양지차였다. 안정환 <문화방송>(MBC) 해설위원은 월드컵에서 결정적인 골을 2개나 넣으며 4강 신화의 주역이 됐지만, 윤 감독은 결국 터키와의 3·4위전에서도 그라운드를 밟지 못했다. 윤 감독은 “가족들을 생각해서라도 운동장에서 1분이라도 뛰고 싶었다. 월드컵이 끝나고 여러 행사가 있었지만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픈 마음뿐이었다”고 말했다. 대표팀 해산 직후 일본의 소속팀 세레소 오사카로 복귀한 윤 감독은 그해 7월8일 <한겨레>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속에 담은 말을 어렵게 꺼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가장 긴 시간이었다”, “술은 1년에 한번, 아니면 두번 먹는데, 이번에 진하게 마셨다. 마시지도 못하지만 안 마시면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한번 원없이 마셨다”며 괴로움을 토로했다.





윤정환 사간도스 감독은 2002년 월드컵에서 뛰지 못한 비운의 스타였다. 맨 위 사진은 스페인과의 월드컵 8강전을 하루 앞둔 2002년 6월21일 윤정환(가운데) 선수가 박지성, 김남일 선수와 함께 광주의 숙소로 들어서는 모습이다. 윤형중 기자, <한겨레> 자료사진, 사간도스 구단 제공
월드컵에서 한번도 뛰어보지 못한 아픔

2014년, 또다시 월드컵이 돌아온 올해 윤 감독은 일본 프로축구리그에서 ‘신화’를 쓰고 있다. 2011년 2부리그에서도 중하위권에 맴돌던 ‘약팀’ 사간도스의 감독으로 부임해 팀을 1부리그 우승을 노리는 ‘강팀’으로 만든 것이다. 사간도스는 리그 중반인 현재 9승1무4패로 승점 1점 차이로 2위를 기록중이다. 윤 감독 부임 첫해에 팀 역사상 최초로 1부리그 승격이라는 성과를 냈고, 두번째 해엔 재강등될 거란 전문가들의 예측을 뒤집고 리그 5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J리그 역사상 승격된 팀 가운데 최고 성적이었다. 사간도스는 지역주민들의 자랑거리가 됐다. 인구 7만명인 작은 도시 도스(鳥栖·Tosu)에서 홈경기가 열릴 때마다 관중수가 1만명을 넘는다. 국내에서 도스시와 비슷한 인구를 가진 도시는 충남 부여 정도다. 일본축구협회의 자료를 보면, 지난해 사간도스 홈경기의 평균 관중수는 1만2026명이다. 불과 10년 전인 2004년 경기당 평균관중수는 3610명에 불과했고, 5년 전엔 5939명이었다. 윤 감독은 어떻게 사간도스를 강팀으로 만들었을까. 또 2002년 월드컵 비운의 스타 윤정환이 지난 12년간 어떻게 지내왔을까. 브라질월드컵을 한달여 앞둔 5월18일 일본 규슈 사가현 도스시의 사간도스 클럽하우스에서 윤 감독을 만났다.

-선수 시절 창의적인 플레이를 한다는 평가를 많이 받았는데, 유독 월드컵과는 인연이 없다.

“1994년 미국월드컵을 앞두고 김호 당시 대표팀 감독님에게 여러번 부름을 받기도 했지만, 결국 최종 명단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땐 대학생이었고 나이도 어렸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 출전한 이후 차범근 감독님이 많이 아껴줬는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1998년 월드컵에도 나가지 못했다. 2002년엔 어렵게 최종 명단에 들어갔는데도 경기에서 뛰지 못했다. 국가대표로 선발돼 여러 경기를 뛰었지만, 월드컵을 한번도 뛰지 못한 아픔이 있다. 절치부심을 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2002년 월드컵 직전만 해도 플레이메이커로 중용될 거란 예측이 많았다. 평가전이던 스코틀랜드전에선 1골1어시스트로 맹활약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운동했고, 감독이 원하는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훈련할 땐 다른 선수들보다 한발이라도 더 뛰려고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도 운동장을 밟아보지도 못해 굉장히 자존심이 상했다.”


사간도스는 규슈 유일 1부 팀
팀 활약 속 인구 7만명 도스의
경기당 평균 관중수는 1만여명
도스가 어디 있는 도시인지
모르는 일본인은 이제 없다

2006년 사간도스 선수로 뛰다
2011년 2부리그 중하위권일 때
감독 부임해 첫해에 1부 승격
2부 강등될 거란 예측 뒤엎고
1부에서도 1·2위 다투는 중


윤 감독에게 월드컵은 여전히 회한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자신을 담금질하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선수 시절 윤정환은 좀 남다른 선수였다. 그가 공을 잡으면 예상치 못한 곳으로 전진패스가 이어졌고, 상대 수비수가 닿지 않으면서 같은 팀 공격수가 달려가 받을 수 있는 지점에 정확하게 공이 전달됐다. 다른 선수들의 움직임을 눈여겨봤다가, 공을 받는 즉시 쳐다보지도 않고 수비가 뚫린 지점으로 정확히 패스를 연결했다. 그런 그에게 ‘패스의 대명사’, ‘최고의 플레이메이커’, ‘꾀돌이’란 별명이 잇따랐다. 하지만 ‘몸싸움과 체력이 약하다’, ‘수비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평가도 있었다. 장점은 그를 스타 선수로 키웠지만 단점은 월드컵에 뛰지 못한 비운의 선수로 남게 했다. 하지만 감독으로서의 윤정환은 달랐다.

-어떻게 사간도스로 오게 됐나?

“전북에서 2005년 시즌을 마치고, 선수 생활을 하면서 지도자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팀을 찾았다. 2000년부터 3년간 세레소 오사카에서 뛴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 리그가 익숙했다. 그때 에이전트가 물색한 팀이 사간도스였다. 이 팀의 수석코치가 한국에 와서 내가 경기를 뛰는 모습을 보고, 정식으로 영입 절차를 밟았다.”

-사간도스는 그때 2부리그 팀이 아니었나?

“세레소 오사카에서 뛸 때도 2부리그로 강등된 팀을 1부리그로 재승격시킨 경험이 있다. 사간도스도 1부리그를 목표로 했다. 당시 축구선수로서 나이도 꽤 있는 편이어서 좋아하는 축구를 계속할 수 있는 팀에 가고 싶었다. 1부리그 승격이라는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다는 점도 구미가 당겼다.”





윤 감독이 지난 4월12일 방포레 고후와의 경기에서 교체를 앞두고 선수에게 지시하는 장면. 윤형중 기자, <한겨레> 자료사진, 사간도스 구단 제공
선수로 뛸 때 1년에 한번씩 퇴장당한 사연

-이 팀의 첫인상은 어땠나?

“일본 프로팀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열악했다. 탈의실조차 없어 선수들이 창고 등을 빌려 옷을 갈아입었다. 연습장도 비좁았다. 후보 선수들은 근처에 있는 공원에 가서 훈련을 해야 할 정도였다.”

1997년에 창단된 사간도스는 1999년 일본프로축구 2부리그에 진입했으나 대부분 중하위권에 맴돌았다. 그나마 최고 성적을 올린 시기가 윤 감독이 선수로서 합류한 첫해인 2006년이다. 그해 4위에 올랐다. 하지만 이듬해 다시 8위로 추락했다.

-선수로 와서 어떻게 감독이 됐는지 궁금하다.

“경기를 하게 되면 감독이나 코치 이외에 경기장 안에서의 리더가 필요하다. 사간도스가 노장이었던 나를 뽑아 온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렇게 팀 내에서 리더 역할을 하며 경기를 조율하고 이끌었다. 그런데 함께 뛰는 선수들의 마음가짐을 보니 승리에 대한 간절함이 보이지 않더라. 한번은 감독이 선수들 한명 한명에게 스피치를 시켰다. 그때 내가 한 말이 ‘2002년 월드컵 때 누가 한국이 4강에 올라갈 줄 알았겠나. 이루고자 하는 꿈이 있고 그걸 달성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면 분명히 달성한다. 그런데 우리 팀은 그런 노력도, 목표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감독이 해야 할 이야기처럼 들린다.




윤 감독이 부임한 첫해인 2011년 1부리그로의 승격을 확정짓고 기뻐하는 모습. 윤형중 기자, <한겨레> 자료사진, 사간도스 구단 제공
“당시 감독, 코치가 이끄는 지휘 방향에 잘 따랐다. 하지만 속으로는 나름대로 팀을 어떻게 바꿔야 강해질 수 있을지를 연구했다. 또 선수로 뛸 때, 1년에 한번씩 퇴장을 당했다. 한번은 우리 선수가 넘어져 있는데 상대팀 선수가 공을 차서 경기를 속행하더라. 달려가서 상대 선수의 몸을 밀쳤고 바로 퇴장을 당했다. 그때 구단 경영진이 일본 선수에게서 쉽게 볼 수 없는 승부근성을 가지고 있다며 나를 눈여겨봤다고 했다.”

-은퇴하고서 다시 한국에 올 생각은 하지 않았나?

“한국에 갈 생각도 잠시 해봤다. 하지만 한국에 가면 감독을 할 기회가 쉽게 오는 것이 아니다. 여기보단 여건이 좋은 팀에서 코치를 할 수 있지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여겼다. 구단 경영진도 ‘여기서 좋은 결과를 내면 팀의 역사를 새로 쓰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 말을 듣고 도전의식이 생겼다. 아무것도 아닌 상태에서 도전해보는 것이 낫지 않겠나. 내가 좀 자기 자신을 힘들게 만들어서 이겨내려는 성격이다. 약간 변태적인 성격이다.(웃음)”

-감독이 될 당시 일본 프로축구 1, 2부리그 통틀어 최연소였다.

“2007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고서 구단의 기술고문(technical adviser)이 됐다. 구단에서 새로 직책을 만들어 지도자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기술을 자문하면서 한편으론 유소년 팀을 맡아 지도했다. 그때 회사가 어떻게 선수를 육성하고 수익을 내는지 등 팀 운영과 경영에 대해 두루 살필 수 있었다. 2009년 코치 한명이 나가면서 그 자리에 들어갔고, 그해 리그에서 5위를 기록해 꽤 좋은 성과를 냈다. 하지만 시즌이 끝나고서 당시 감독이 몇몇 주전선수를 데리고 다른 팀으로 이적해 팀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그때 구단에선 바로 나를 감독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한국에서 취득한 지도자 자격증으로는 일본 프로팀의 감독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1년간 수석코치를 하며 지도자 자격증을 취득했다.”

-감독이 예약된 수석코치였다는 건가?

“경영진이 팀의 총괄 운영을 맡기려고 데려온 마쓰모토 이쿠오 단장에게 1년간 임시 감독을 맡겼다. 하지만 팀 훈련은 내게 일임했다. 그때부터 우리 팀이 해야 할 축구를 선수들에게 설명했고, 그에 맞게 훈련하기 시작했다. 특히 체력훈련만큼은 혹독하게 시켰다. 여기 인근에 아사히야마라고 야트막한 동산이 있다. 꼭대기까지 올라가려면 290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내려오는 길은 경사가 낮은 비탈길이다. 그곳을 첫해에 7바퀴 뛰었고 매년 바퀴수를 늘려 올해엔 12바퀴를 뛰었다. 처음엔 선수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이런 훈련을 의아해했다. 전술적으로도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다. 사간도스는 패스 위주의 경기를 하기엔 조직력과 선수들의 개인 기량이 부족했다. 오히려 우리 진영에서 패스를 돌리다 뺏겨서 실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하기보단 타깃맨(전방 공격수)을 앞에 두고 상대 진영으로 볼을 띄우면, 공중볼을 다투고 나서 미드필더가 압박해 공을 따내는 것이 낫다. 그렇게 하면 안정적으로 공격할 수가 있고, 볼을 뺏겨도 바로 역습을 당하지 않는다. 또 돌파력이 좋은 선수를 좌우 날개로 내세워 측면 공격을 원활하게 했다.”

-그래도 감독이 따로 있기 때문에 선수들이 혼란스러워하지 않았나?

“그 점이 문제였다. 1년 뒤 감독을 맡기로 했지만 감독의 지시와 혼선이 있을 때가 있었다. 또 선수들은 새로운 방식의 훈련과 전술을 믿지 못했다. 팀을 새롭게 만들기 위해선 우선 선수들의 혼돈부터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시즌 중반 이후부터 선수들과 개인면담을 자주 했다. 그때 내가 어떤 팀을 만들 것이고, 각 선수들이 어떤 역할을 해줘야 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그때 날 믿고 따라와준 선수들은 지금까지도 주축 선수로 남아 있다.”





사간도스가 좋은 성적을 거두자 도스시는 이곳에 ‘사간도스 훈련장’이란 표지를 설치하고 길을 정비했다. 김희호 사간도스 코치가 표지판을 가리키고 있다. 사간도스는 올해 겨울훈련에서 이 산을 12바퀴 왕복하는 훈련을 두 차례 실시했다. 윤형중 기자
팀 주축 도요다, 한때 크게 반발했지만…

-항명하는 선수가 있었다고 들었다.

“지금은 팀의 주축인 도요다 요헤이 선수가 훈련 방식에 불만을 가진 적이 있었다. 항명까진 아니고 해프닝이었다. 하루는 내가 심판 역할을 하며 연습게임을 시켰는데 도요다가 수비수의 발에 걸려 넘어졌다. 나는 경기를 속행했지만 도요다가 입으로 호각 소리를 내어 경기가 갑자기 중단됐다. 선수들 대부분이 새로운 훈련 방식에 힘들어했던 예민한 시기였다. 나는 도요다 선수에게 다가가 무슨 일이냐고 했다. 그는 ‘반칙인데 왜 휘슬을 불지 않느냐’며 문제를 제기했고, 나는 ‘경기에선 심판이 못 보고 넘어가도 그대로 플레이해야 한다. 그게 프로다. 이렇게 훈련하려면 네가 감독을 해라’라며 호각을 건넸다. 도요다는 당황했고 다시 경기를 속행했다. 그때 나도 좀 세게 나갔는데, 잘못된 행동은 분명히 지적해야 했다. 그 선수는 나중에 따로 불러서 내 의도를 재차 설명했고 감정을 풀었다.”


윤 감독은 선수 시절 다소 내성적이고 예민한 성격으로 알려졌다. 선수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말수가 많지 않고, 감독에게 먼저 다가가는 성격도 아니었다. 1998년 월드컵 당시 한국 국가대표팀을 이끌었던 차범근 <에스비에스>(SBS) 해설위원은 당시 한국 축구의 미래라고 손꼽은 윤정환, 고종수를 가리켜 “고종수는 성격이 쾌활해 이야기를 하면 먹혔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지만, 윤정환은 속으로 안고 가는 스타일이라서 이야기를 해도 받아들인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윤 감독의 아내는 “남편은 아주 철두철미하고 예민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는 고집이 강했지만 속을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기도 했다. 2002년 월드컵 직후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도 “나는 (아픔이 있어도) 속으로 삭이는 스타일이다. 항상 속으로 혼자 삭인다. 그래서인지 (당시 월드컵) 경기가 끝나면 뒷골이 뻐근하고 머리가 아팠다”고 말했다. 사간도스에서도 그의 외골수 기질은 여전하다. 선수 시절부터 팀과 선수들을 눈여겨보며 자기 나름의 구상과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를 실행하는 방식은 달랐다. 선수들에게 먼저 다가가 대화하고 혹독한 체력훈련을 감독인 그도 함께 받았다.

그의 훈련 방식에 불만이 많았던 도요다는 이제 팀의 주축이다. 1부리그 진입 첫해에 19골로 전체 득점 2위, 지난해엔 20골로 득점 3위를 기록하며 일본 대표팀에도 선발됐지만 이번 월드컵에선 아쉽게 최종 23인 명단에 포함되지 못했다. 도요다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처음 윤 감독이 부임했을 땐, 훈련 방식이나 전술 등에 의아한 대목이 많았다. 훈련량도 지나치게 많았다. 과연 이렇게 해서 팀이 나아질 수 있을지 의구심이 컸지만 이젠 윤 감독을 따라가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2년간 일본과 중국의 프로팀에서 더 많은 연봉과 선발 기회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영입을 제안받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사간도스의 주전 공격수로 남아 있다.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는 “윤 감독에게 의리를 지키고 싶었다. 더 좋은 대우를 받는 것보다 윤 감독과 같이 뛰는 것이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윤 감독이 만든 사간도스의 팀 컬러는 인터뷰 하루 전인 5월17일 오미야 아르디자와의 경기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이날 경기는 사간도스는 0-1로 끌려갔으나, 경기 종료 20여분을 남기고 일방적으로 몰아붙였다. 결국 후반 38분 페널티킥을 성공시켜 동점이 됐다. 남은 10여분 동안에도 사간도스는 공세를 멈추지 않았지만, 결국 무승부로 경기가 끝났다. 이 경기 전까지 리그 1위를 달렸던 사간도스는 같은 날 승리한 우라와 레즈에 승점 1점 차로 밀려 2위로 내려왔다. 하지만 여전히 선두권에서 우승을 향해 경쟁하고 있다.

-어제 경기를 보니 경기 후반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것이 인상적이더라.

“우리 팀이 후반으로 갈수록 강하다는 것은 이젠 일본 내에서 유명하다.”

-감독님이 선수 시절에 하던 플레이와는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나도 처음엔 패스축구를 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그런 축구를 즐겼고, 좋아하는 팀도 정밀한 패스로 좋은 플레이를 하는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아스널이었다. 하지만 우리 선수들에게 맞는 축구가 아니었다. 많은 일본 팀들은 패스를 하며 전진하지만, 우리는 앞으로 패스하고 거기서 떨어지는 공을 잡아서 공격한다. 우린 상대 진영에서부터 압박하기 때문에 선수들의 개인기량이 좋은 명문팀들도 사간도스와 경기를 하면 애를 먹었다. 그 결과 쉽게 지지 않는 팀을 만들었고, 선수들의 패배의식도 떨쳐낼 수 있었다. 이는 히딩크 감독의 네덜란드 축구에서 차용한 부분도 있다. 앞으로는 날카로운 침투패스 등 기술적인 부분도 더 연마할 것이다.”





윤정환과 사간도스 (※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냉정한 전술가의 풍모…매 경기 기대된다”

윤 감독이 새로운 전술을 적용한 부임 첫해에 사간도스는 2부리그의 22개 팀들 가운데 2위를 기록했다. 팀 역사상 첫 1부리그 승격이었다. 1부리그에 뛰어든 첫해인 2012년 팀 총연봉은 51억원에 불과했다. 전통의 강팀인 우라와 레즈(272억원), 나고야 그램퍼스(313억원) 등에 비하면 5분의 1도 안 되는 수준이다. 하지만 사간도스는 강팀들을 연파하며 시즌 내내 상위권에 맴돌았고, 시즌 막판까지 리그 3위까지 주어지는 아시아챔피언스리그(ACL) 출전권을 다퉜다. 하지만 막판 두 경기에서 연달아 패배하며 리그 3위였던 우라와 레즈에 승점 2점을 뒤진 5위로 마감했다. 그 성적도 2부리그에서 승격된 팀이 기록한 역대 최고 순위였다.

-도스가 작은 도시지만 축구 열기가 대단하다. 거리마다 사간도스 깃발이 걸려 있고, 식당마다 팀 포스터가 붙어 있다.

“지금은 사간도스가 규슈에서 유일한 1부리그 팀이다. 규슈에 8개 축구팀이 있지만 사간도스를 제외하면 지금은 모두 2, 3부리그에 있다. 여기 시민들은 사간도스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땐 일본 사람들 사이에서도 ‘도스가 어디에 있는 도시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사간도스가 리그 1, 2위를 다투기 때문에 일본에서 도스라는 지명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히딩크 동기부여능력은 탁월
2002년 당시에도 나에게
‘체력이 더 이상 문제 아니다’
말하며 열심히 훈련하도록 독려
나도 그런 지도자 되고 싶어”

2002년에 속으로 삭이던 스타일
사간도스에서도 외골수 기질 여전
자기 나름의 구상과 계획 세운 뒤
선수들에게 먼저 다가가 대화하고
혹독한 체력훈련을 함께 받았다


5월17일 오후 도스에선 가족 단위로 경기장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유니폼을 입은 어린아이들은 부모의 무릎을 오르내렸고, 휠체어를 타고 온 장애인도 눈에 띄었다. 시시각각 환호하고 아쉬워하는 소리가 있었지만 커다란 음향 장비나 치어리더는 없었다. 이날 경기장을 찾은 한국인 석진은(51)씨는 “가족 단위로 경기장을 많이 찾기 때문에 한국과는 응원 문화가 좀 다르다. 더 차분하고 경기 관람에 집중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어린 자녀들과 경기장을 찾은 쓰쓰미 나오키(47)씨 부부는 “윤 감독이 오고 나서 매 경기 기대가 된다. 선수 때부터 가슴이 아주 뜨거운 사람이었는데, 이젠 냉정한 전술가의 풍모도 느껴진다”고 말했다. 선수단 버스 앞에서 도요다 선수의 사인을 받으려고 기다리던 나카야마(43)씨는 “오늘 이길 수 있는 기회가 많았는데 비겨서 아쉽다. 그래도 J리그에서 1, 2등을 하고 있다는 게 정말 대단하다. 도스 시민들은 상당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윤 감독이 오고 나서 이 모든 변화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선수들의 유니폼을 판매하는 상점의 직원 구키모토 아이카(18)씨는 “매년 유니폼에 새겨지는 스폰서와 디자인이 조금씩 바뀌는데 팬들은 거의 매년 새 유니폼을 구매한다”고 전했다.

-어릴 적에 책으로 축구를 익혔다고 들었다.

“초등학생 시절, 공을 정말 잘 차고 싶었다. 그때 축구협회에서 발간된 축구 기본기에 대한 책을 누군가에게서 받았다. 제목이 기억나지 않지만 그 책에는 축구의 기본기와 전술적인 부분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 책을 중학교 때까지 매일 보면서 연습했다. 책에 나온 대로 드리블과 트래핑을 하고 공을 찼다. 고등학교 때부턴 이미지 트레이닝을 많이 했다. 어릴 때 방에 누우면 천장이 축구장과 비슷한 비율의 직사각형이었다. 거기에 가상으로 포메이션을 만들어 침투패스를 어떻게 넣어야 수비진을 허물 수 있는지를 상상하곤 했다. 축구를 하는 꿈을 많이 꿔서 좁은 방에서 함께 자던 형들을 잠결에 발로 많이 찼다.(웃음)”

-이미지 트레이닝이 남다른 패스의 비결인가?

“어떤 사물이나 상황을 관찰할 때, 의식적으로 다른 관점으로 보려는 것이 어릴 적부터 습관이다. 예를 들어 바르셀로나와 어느 약팀이 경기를 한다고 하자. 이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르셀로나의 화려한 공격에 집중한다. 하지만 나는 약한 팀을 눈여겨본다. 어떻게 대응해서 싸우는지, 잘 막고 있으면 비결이 무엇인지, 무너지고 있으면 무엇이 문제인지를 관찰한다. 그런 성격이 플레이에도 영향을 미친 듯하다.”





사간도스 ‘지옥의 훈련장’으로 유명한 아사히산 입구와 290개의 계단이다. 윤형중 기자
한국 국가대표팀 감독이 앞으로의 목표

-오늘의 윤 감독을 만든 지도자는 누구인가?

“기성용 선수의 아버지인 기영옥 전 금호고 감독이 은사님이다. 그분을 통해 처음으로 축구에 눈을 떴다. 기 감독님은 생각하는 축구를 강조했다.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패스를 하거나 시야를 넓게 보는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대표팀을 이끈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과 첫 프로팀이었던 부천 유공을 이끈 발레리 니폼니시(네폼냐시), 두 러시아 감독은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사람들이다.”

윤 감독은 선수 시절 한국 축구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고 평가받는 ‘니포축구’(니폼니시 축구)의 핵심이었다. 니포축구에 매료된 팬들은 1995년 국내 최초의 서포터스인 ‘헤르메스’를 결성했고, 초기 축구붐을 이끌었다. 헤르메스는 2006년 부천 에스케이(SK)가 제주로 연고를 옮겨 응원할 팀을 잃자 십시일반으로 힘을 모아 2007년 시민구단 ‘부천FC 1995’를 창단했다. 이 구단은 2008년 아마추어리그인 K3리그에 참가했고, 2012년 프로축구 2부리그인 K리그 챌린지에 정식으로 등록했다. 니폼니시와 윤 감독이 만든 부천 유공의 유산이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셈이다.

-한국 축구가 좋은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학맥·인맥으로 형성된 파벌이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동의하나?

“파벌이 분명히 있고 영향력을 미친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지, 내부에선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나는 학맥이 거의 없는 지방대를 나왔다. 지방대 출신으로 국가대표가 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선수는 어느 정도 실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 지도자가 되면 파벌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일본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것도 그런 영향이 있다. 여기에서 성공해서 실력을 인정받고 나중에 한국에서도 지도자 생활을 하고 싶다.”

-앞으로 목표가 있다면?

“선수 시절에도 국가대표가 목표였듯이, 지금도 마찬가지로 국가대표팀 감독이 목표다. 나중에 나이가 들면 유소년 축구교실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

-사간도스란 윤 감독에게 어떤 곳인가?

“인생의 공부를 하게 해준 곳이다. 머릿속 구상을 현실화하고, 목표로 한 것을 달성하는 경험을 하게 해줬다. 감독을 하는 기간에 사간도스가 명문팀으로 도약하기 위한 기틀을 마련하고 싶다. 지금은 사간도스에서 뛰고 싶어하는 선수들이 상당히 많다. 이럴 때 좋은 선수들을 키우고 조금만 기반을 잡으면 10년, 20년 1부리그에 머무는 명문팀이 될 수 있다.”

-윤 감독처럼 대표팀에 선발되고도 월드컵에 뛰지 못하는 선수가 생긴다면, 무슨 말을 해주고 싶은가?

“그 마음이 너무나 힘들 거라는 것을 잘 안다. 그렇지만 대표팀에 선발된 것만으로도 영광스러운 일이다. 경기에 뛰지 않아도 팀에 도움이 되는 일은 분명히 있다.”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히딩크 감독과 니폼니시 감독이다.”

-본인에게 큰 아픔을 줬음에도 히딩크 감독을 가장 존경하나?

“그땐 서운한 마음이 있었지만, 그분에게 정말 많이 배웠다. 선수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능력은 탁월하다. 2002년 당시에도 내게 ‘(의구심을 가졌던) 체력이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며 더 열심히 훈련하도록 독려했다. 나도 그런 말을 듣고 더 기대감을 갖고 열심히 훈련에 임했다. 비록 결과는 안 좋았지만, 히딩크 감독이 선수에게 다가가 동기를 부여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나도 그렇게 팀을 잘 이끄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

도스(일본)/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