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윤봉길 선생(1908.6.21~1932.12.19)
중국 상하이에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채소 장사를 하던 그는 1931년 겨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인 김구(金九)를 찾아, 독립운동에 몸바칠 각오임을 호소해 그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김구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일왕의 생일연(천장절(天長節))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를 폭탄으로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며[3], 협의 끝에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하기로 결의하였다.
당시 폭탄은 도시락 모양과 물통 모양으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폭탄을 도시락 및 물통으로 위장하려는데에 목적이 있었다. 당시 일본 일왕의 생일연(천장절(天長節))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에서 식사가 제공되지 않으므로 일본측에서 이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각자 도시락을 지참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삼엄한 경계를 뚫고 공원에 입장한 후 11시가 되자 중국주둔 일본군(천진군)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이 등장했고 상하이에 있는 외교관과 내빈이 자리를 잡았다. 군악이 울려퍼지고 열병식이 이어졌다. 천장절 행사가 끝나자 외교관과 내빈은 돌아가고, 일본인들만 남아 일본 상하이교민회가 준비한 축하연을 열었다.
11시 50분 일본 국가가 울려퍼지는 순간 윤봉길은 물통 폭탄을 단상으로 힘차게 던졌다.[4] 경축대 위에 폭탄이 명중한 것을 확인한 윤봉길이 자결하기 위해 도시락 폭탄을 떨어뜨렸으나 불발하였다. 도시락 폭탄이 불발하자 일본 헌병들이 윤봉길을 덮쳐 구타하였다. 윤봉길은 구타를 당하면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외쳤다.[5]
홍커우공원에서의 폭탄 투척을 실행한 윤봉길은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3],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쓰구 등을 죽이고, 총영사 무라이는 중상,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중장은 실명되었고,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중장은 다리 절단 중상을 당했으며, 주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는 절름발이가 되었다.
당시 중화민국의 장제스(蔣介石)는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이 폭탄 투척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중국의 100만이 넘는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이 해내다니 정말 대단하다."라며 감탄하였고, 이는 그 동안 장제스가 별다른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폭탄 투척 직후 체포, 곧바로 헌병으로 넘겨지면서 보다 가혹한 심문과 고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1932년 5월 28일 상해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932년 11월 18일 일제 대양환으로 일본 오사카로 후송되어 20일 오사카 육군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2년 12월 18일 가나자와 육군구금소로 이감되었다.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에서 총살당했다. 1932년 12월 19일 새벽 7시 27분 일본 이시카와 현 가나자와 시 미쓰코지야마 서북골짜기에서 형틀에 묶인 윤봉길 선생은 미간에 총알을 맞고 13분 뒤에 숨졌다. 시신은 아무렇게나 수습돼 가나자와 노다산 공동묘지 관리소로 가는 길 밑에 표식도 없이 매장되었다. 사형 집행 전에 미리 파 놓은 2미터 깊이의 구덩이에 시신을 봉분(封墳)도 없이 평평하게 묻어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윤봉길 의사가 수뇌부를 섬멸시킨 데 대한 일제 군부의 복수와 대우였다